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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선진국된 대한민국
  • 이용웅 기자
  • 등록 2019-10-25 17:24:02
  • 수정 2019-10-25 17: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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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내기 중에 스킨스 게임 방식이 있다. 지금 한창 일본에서 열리고 있는 미국 PGA ‘조조 챔피언십’ 대회 직전인 지난 21일 타이거 우즈, 로리 맥길로이, 제이슨 데이, 마스야마 히데키 등 4명의 내로라 하는 선수들이 주최측이 내놓은 상금 수억 원을 놓고 스킨스 게임을 했다. 홀마다 게임을 이기는 사람이 얼마씩 빼먹는 게임으로 결국 호주의 제이슨 데이가 우승했다.
 한국의 주말 골퍼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게임을 많이 하는데 타수가 낮은 고수의 일방적인 독주를 막기 위해 스킨스에 두가지 룰을 추가한다.
 하나는 각 홀을 마친 뒤 4개의 스틱으로 제비뽑기를 통해 둘씩 편을 가르는 ‘뽑기’ 룰이다. 타수를 많이 잃었더라도 잘친 선수하고 편을 먹게 되면 돈을 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다른 하나는 일명 OECD 룰이다. 스킨스와 뽑기를 통해 일정 금액 이상을 가져간 플레이어는 다음 홀부터 골프 공이 벙커에 빠지거나 오비나 패널티 에어리어에 들어간 경우, 그린 위에서 쓰리 펏 이상을 한 경우, 트리플 보기 이상을 한 경우 홀당 기준 금액을 토해내는 방식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그에 상응하는 모범을 보여야 하듯 골프에서도 일정 금액 이상을 취득한 경우 위에 열거한 실수를 할 경우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품위유지를 강제한다. 돈을 따지 못한 ‘개도국 선수’ 입장에서는 기회를 엿볼 수 있는 합리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모든 선수들이 게임 중 OECD에 가입하지 않고 될 수 있으면 막판까지 끌어보려 한다는 점에서 이 룰의 묘미가 있다. 아무래도 OECD에 빨리 가입 될 경우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꺼려 조심스럽게 친다.
 잘치는 골퍼의 견제장치로 OECD 방식이 등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가 1996년 갑자기 OECD에 가입하는 무리수를 둔 것을 풍자한 것 같다. 깜냥도 안되는 데 선진국 클럽에 가입한다는 비난이 난무했으나 YS정부는 세계화를 기치로 막무가내로 밀어 부쳤다.
하지만 ‘빛좋은 개살구’는 2년도 안돼 제빛을 드러냈다. 한보를 필두로 문어발 확장으로 황제경영을 일삼은 부실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1997년말 단군이래 최대 국난인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제통화기금(IMF)에 경제통치를 맡겨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외환위기를 20년이 넘게 지난 옛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현재 성장률이 엄청 떨어지고 미중 무역전쟁과 일본의 수출규제 등으로 한국 경제환경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바야흐로 선진국 문턱을 넘는 ‘웃픈’ 상황까지 연출되고 있어 더 씁쓸하다.
  23년전 정부가 기초실력도 안되면서 억지로 선진국 가입을 밀어부쳤다면, 지금은 타의에 의해 ‘억지 춘향’처럼 선진국 지위를 택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부가 25일 대외경제 장관 화의에서 미래 세계무역기구(WTO) 협상부터 개발도상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그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 26일 경제적 발전도가 높은 국가가 WTO 내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특혜를 누리고 있다며 WTO가 90일 내 이 문제에 실질적 진전을 이뤄내지 못하면 미국 차원에서 이들 국가에 대한 개도국 대우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마감 시한은 지난 23일까지였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우리 농업의 민감분야는 최대한 보호할 수 있도록 유연성(flexibility)을 갖고 협상할 권리를 보유·행사한다는 전제아래" 이처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홍 부총리는 "이번 의사결정 과정에서 쌀 등 민감품목에 대해 별도 협상권한을 확인하고, 개도국 지위 포기가 아닌 미래 협상에 한해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발표했다.정부는 우리가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더라도 이는 미래 WTO 협상부터 적용되는 것이기에 새로운 협상이 시작돼 타결되기 전까지는 기존 협상을 통해 이미 확보한 특혜는 변동 없이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1995년 WTO 가입시 개도국임을 주장했지만,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계기로 농업과 기후변화 분야 외에는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우리나라는 농업 분야에서 개도국 특혜를 인정받음에 따라 그간 관세 및 보조금 감축률과 이행 기간 등에서 선진국에 비해 혜택을 누려왔다.
 어찌보면 선진국 클럽에 가입해 놓고 23년을 그에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버티며 공짜를 누려온 셈이다.  이번 결정이 더욱 아쉬운 것은 우리 농업의 경쟁력에 기초하지 않고 트럼프의 협박에 밀린 결정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23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선진국 지위를 유예해 가며 우리 농업 경쟁력 살리기에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 떠오르는 게 별로 없다. 역대 대통령을 바롯해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농업 보조금 지급에 열을 올리거나 부채탕감 등 미봉책만 남발해왔기 때문이다.
 최고 정책 결정권자의 성급한 OECD 가입 결정과 그동안 그 오랜기간 동안 안이한 농업정책이 우리 경제 전체에 어떤 후폭풍을 몰고올지 우려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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