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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손금 -시인 이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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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3-08-23 09: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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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떨어진 종이연 하나

곤두박혀 있다

벗은 겨울나무 가지에 걸려 떨고 있다

 

찾아주는 이

흰 눈과 여린 햇살뿐이어도

 

바람의 집에 문 닫아 걸고 

칼끝으로 손금을 스스로 만들고 있다

 

잠 든 지구 허벅지 어느 틈새에서 이름 불리어

칼바람 속 종이연 하나 짚신 끈 조여 매고 일어선다.

 

얼어붙은 땅 위에

어느새

초록 물결 가만가만 밀려온다.

 

 

<시작노트>

 내 손바닥에는 일직선으로 손가락을 향해 치뻗어 있는 손금이 있다.

그런데 오른 손 중지의 손금 하나가 위로 올라가다가 방향을 바꾸어 검지와 중지 사이로 빠져 나가고 있다. 나는 가끔 혼자 앉아서 그 손금이 위쪽으로 계속 올라가도록 만들려고 애쓰기도 한다. 칼끝은 아니지만 손톱끝으로라도....

 그것은 내게 주어진 길, 내 이름에 부여된 사명使命에 충실하려는 내 나름의 다짐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중단된 학업을 어렵게 계속하면서, 현실생활에 충실하면서도 좀 더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가기 위해 밤을 밝혀왔다.

 비록 지금의 내가, 벗은 나뭇가지에 걸려 떨고 있는 끈 떨어진 종이연이라 하더라도 나를 찾아주는 이 아무도 없고, 오직 겨울 나뭇가지를 더욱 떨게 하는 흰 눈과 칼바람뿐이라 하더라도 나는 내 스스로의 의지로 지구의 허벅지 저 깊은 명부冥府에 잠들어 있는 내 이름을 불러내어 초록물결로 온 세상을 덮으리라. 불모의 겨울, 동토의 겨울 땅을, 우리 함께 서로 위하며 살아가는 따스하고 아름다운 꽃향기 가득한 세상으로 만들고 말리라. 그 사명을 완수하려고 나는 오늘도 밤을 새워 손금을 만들고 있다.


 [이혜선시인 약력] 

경남함안 출생. 1981년『시문학』추천. 시인, 문학평론가.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시집『흘린 술이 반이다』『새소리 택배』등. 저서『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아버지의 교육법』등. 세종우수도서(2016). 윤동주문학상 등. 동국대 외래교수,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문체부 문학진흥정책위원 역임. 유튜브: 이혜선시인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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