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마을은 순백으로 저물어가고
희미한 불빛 따라 가는
오르막길은 아득하다
산 정상에
다소곳이 앉은 소복한 설경은
먼 몽블랑 산의 모습이다
눈길을
밟는 소리에 유년이 떠오른다
절벽 아래
폭포의 발바닥을 간질이던 고드름은
어디에도 없다
흰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초승달 한 조각
눈보라치는 슬픈 과거를 횡단한다
방탕한 바짓가랑이는 젖고
가슴은 허허롭다
백설의 땅에 귓바퀴가 얼어붙고
삭막한 허공을 돌며
썰매를 태워주던 까마귀는 힘차게 날아오른다
[시작 노트]
벽이 된 유리창 곁에 붙박이처럼 앉은 과거의 여자가 흐릿한 사진을 들여다보는 듯 바다를 구경한다. 젖은 유리창에 비 내리는 얼비친 풍경과 저물어가는 해안으로 출몰 하는 흰 돛단배들이 쏟아지는 장면 등을 여자는 펑펑 눈 내리던 어느 해, 일본 아소산을 순백의 옷으로 순식간에 덧입혀 버린 설경을 생각하며 쓴 시 이다
한가롭고 여유 있어 보이는 넉넉한 바다 속으로 풍덩 빠져들듯
눈보라 속을 방황하고 싶었던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해 쓴 시 이다
[최귀례시인 약력]
2003년 문예한국. 2021년 창조문예 시 추천 등단. 부산크리스천문인협회 회장
(사)부산시인협회 이사, 부산여류시인협회 회장 역임
시집 「폴 세잔느의 여행」 「낮잠」「여자가 테라스에 앉아 있다」 「바다의 뿔」 「타인들의 마을」
현재 예향다원 원장